한참 전에 <19세기 비망록>을 읽은 후 언젠가 봐야지 했던 같은 작가님의 데뷔작 <무덤의 정원>.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다. (사실 이 후기를 올리기 한 달 전에 다 읽었는데 후기를 미루고 있었음...) <19세기 비망록>이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듯이 <무덤의 정원>은 동화 미녀와 야수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다만 <19세기 비망록>은 빅토리안 잉글랜드라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편, <무덤의 정원>은 마법과 저주가 존재하는 가상의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잔혹동화나 메르헨스러운 느낌...
둘의 줄거리 자체는 굉장히 다르지만 둘 다 동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인데다가, 원작 동화들 자체가 남주 포지션이 ‘괴물’로 설정되어 있다보니 개인적으로는 좀 비슷한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ㅋㅋㅋ 남주를 향한 여주의 끊임없는 불신과 그럼에도 느끼게 되는 애정 사이에서의 갈등..ㅋㅋㅋ <19세기 비망록> 때도 생각했지만 작가님이 애증이라는 감정선을 굉장히 잘 잡으신다고 생각했다.
이하 스포주의!
작가님이 블로그에서 ‘나만이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만나면 도망쳐라’라고 하셨던게 너무 웃긴데 <무덤의 정원>의 알렌이 딱 그 짝이다.. 알렌과 있으면서 유영(로자벨)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 미친 남자를 만나서 나도 미쳐버릴 것 같다’임ㅋㅋㅋㅋ 나만이 제정신으로 이 남자를 볼 수 있으며 오직 내 곁에서만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는 남자.. 완전 로맨스 클리셰 그 자체 아니냐고요. 하지만 언제나 로자벨과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고 우릴 죽고 싶게 만드는 알렌이라는 남자... 성격장애다.
근데 정말로.. 로맨스 소설에서 성추행, 폭행, 가스라이팅 전부하는 남주 있기 힘든데 알렌이 이걸 해낸다.. 물론 19금 뽕빨물(?)에선 꽤 나오기도 하지만 그건 그걸 통해 주인공이 나름의 쾌락을 느끼는.. 독자 입장에선 길티 플레저인 셈인데 이 소설에서는 유영이 정말 그걸 범죄로 인식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독자도 맘이 아프다.. 근데 그런 남자를 종국에는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작가님.. 당신의 필력 대단합니다.
이 소설을 시작했다가 결국 새벽 3시까지 읽고 다음날 3시간 자고나서 출근했는데 출근하면서도 내 취향에 대해 너무 회의감 들어서 고민이 되었다..ㅋㅋㅋㅋ 이런 남자.. 현실에 있으면 그냥 가스라이팅 데폭남인데 이런.. 이런 놈을 보고 좋아해도 나 괜찮은 건가.. 내 취향 다이죠부한 게 맞는 것인가.. 나 나름 여태까지 오토메라는 여주 사망률 꽤 높은 장르에서 벤츠남만 거의 골라잡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일부 제외) 나의 취향 의외로 위험했던 것인가..
알렌이 좋았던 지점... 하나는 정말 내 평소 취향과는 좀 다른 점인데... 미친듯이 달콤하다가 갑자기 살벌해지고, 다시 입 속의 혀처럼 굴다가 또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 같이 구는 그 지점이 좋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렌은 얀데레고 뭐고 이런게 아니라 그냥.. 뼛속까지 미친놈이라서... 대체 뭘 그의 스위치를 눌러서 갑자기 발악을 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음... 오밤중에 로자벨을 찾아와서 울면서 제발 심장소리를 들려달라고 애원하고 밤새 껴안고 잔 뒤에 다음날 사랑에 충만해서 행복해진 로자벨이 알렌을 찾아보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거에 대해 불만을 표하니까 "너 지금 질투하는구나?"라고 기분좋게 깔깔 웃다가 갑자기 급정색하면서 "너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라고 하며 또 로자벨을 겁탈하려 드는 알렌...이 너무 좋았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쓰면서도 현타오는데ㅠㅠㅋㅋㅋㅋㅋ 슈퍼달링과 미친놈의 극과 극을 메트로놈처럼 왔다갔다 하는데 그 간극이 너무 짜릿하다... 밀당의 귀재임... 극후반부로 가면 유영과 알렌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다보니 이런 부분이 없어지는데 오히려 좀 아쉬웠음ㅋㅋㅋㅋ 쓰다보니 이거 그냥 흔들다리 효과 아냐?ㅋㅋㅋㅋ
그렇지만 알렌이 좋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방어기제 둘둘인 겁쟁이라는 점일까...ㅋㅋㅋㅋ 로맨스 남주에게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ㅋㅋㅋ 나는 틱틱대며 사람을 밀어내지만 사실은 그건 마음의 상처로 인한 방어기제였고, 그 안에는 초라한 어린애 하나가 들어있는 그런 남캐를 좋아한다..ㅋㅋㅋㅋㅋ (그래서 회피형 남캐도 좋아함..ㅋㅋㅋㅋ) 알렌은 본인이 겪어야했던 저주 때문에 타인을 절대 믿지 않는, 오히려 믿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알렌에게 저주가 듣지 않는 로자벨은 기적과 같은 존재였고, 그는 기적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너무나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로자벨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파괴 충동이 들고, 그 나름대로는 로자벨을 위해서, 로자벨에게 그 충동을 풀지 않기 위해 다른 여자와 자고...(...) 로자벨이 너무나 기적과 같기에 저주를 풀면 신기루처럼 로자벨이 사라질 걸 두려워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로자벨에게 결코 전하지 않는다. 알렌이 겪은 일과 그의 심리를 알게 되면 그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지만 그 사고회로가 일반인과는 저만치 떨어져있으니 남주와 여주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도 갈등이 끊이지 않음ㅠㅋㅋㅋㅋ
그리고 사소한 거지만 알렌은 왕이면서 말투가 '~하니?'인 부분이 너무 귀여운 것 같음.(콩깍지) 콘래드한테서 받은 편지를 뺏고 앙칼지게 "네 친구 남자라며!""바람둥이 계집애, 제기랄,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하는 지점도 너무 귀엽고 소녀 같음...(?)ㅋㅋㅋㅋ 로자벨 왈 "백 년을 산 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방정맞은 그의 행동과 말투"는 직접 밖으로 사람을 보내 바깥세상을 배워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교본이 10살짜리 새침데기 소녀였던 걸까?ㅠㅋ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못된 계집애!" 같은 새침한 말투를 쓰는 왕.... 알렌......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은 알렌이 사랑을 알게 되며 마녀와 닮아가는 부분. 마녀도 학대와 폭력을 당해왔던 사람이었고, 그러한 방식 밖에 몰랐기에 상대를 향한 관심을 그렇게 표현했다. 알렌 역시 마녀에게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로자벨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고. 그나마 알렌은 가족으로부터는 정상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혹은 마녀보다는 약간 더 제정신이었기에 나름대로 노력을 하여 자기 자신에게 제동을 걸었지만.. 여전히 그런 모습이 툭툭 튀어나온다. 사랑으로 인해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닮아가는 자신을 혐오하고, 견디다 못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또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조소하게 되는 자기혐오의 굴레... 너무나 가슴 찢어지고 맛도리임. 역시 나는 자낮남을 사랑하나봐...................
별개로 이 소설 읽으면서 빵 터졌던 지점은ㅋㅋㅋㅋ 유영과 알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알렌이 유영에게 호칭을 바꾸라고 하는데ㅋㅋㅋ 전하(sierre)가 아니라 당신(vousten)이나 너(tuan)라고 불러야한다고ㅋㅋㅋㅋㅋ 아 여기서 너무 빵터졌다...(한때 불어를 공부했던 1인) 중세 프랑스에 비슷한 배경이라고 나오긴 했지만 vouvoyer와 tutoyer의 문제까지 나올 줄은 몰랐죠ㅋㅋㅋㅋ (*프랑스어에서는 2인칭이 tu(너)일 때와 vous(당신)일 때 동사변화가 다르게 일어나므로 인칭대명사가 중요함..) 아무튼 이런 부분이 너무 웃겨서 작가님이 중세 프랑스어의 인칭 대명사를 리서치해서 넣으셨나? 했는데 아마 그건 아닌 것 같고 창작된 중세 프랑스어풍의 언어인 것 같다.. 내가 그냥 못 찾은 걸 수도 있지만..
그리고 섹슈얼한 장면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소설이었다... 19금 소설은 아닌데 소재 자체가 "자신을 보면 여자들이 몸이 달아올라 짐승처럼 달려들게 되는 저주에 걸린 남주"라서...ㅋㅋㅋㅋㅋㅋㅋ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여주가 갑자기 다른 여자랑 자고 있는 남주와 마주치기도 하고.. 자위 중인 남주와도 마주치고... 자위를 도와주기도 하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제로 로자벨과 알렌의 씬도 있다. 표현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15금.. 17금 쯤은 되는 것 같기도... 게임으로 치면 CERO D 정도..ㅋㅋㅋㅋ
다만 결말이 좀 갑자기 난 느낌이라 아쉬웠다. 오히려 작품 중간쯤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데 책이 아직도 40%나 남아서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끝부분에 가서는 마녀나 저주에 대해서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끝나버린 느낌. 알렌과 유영에게 있어서는 다시 만나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해피엔딩이겠지만. 리디 목차에 보면 원래 외전 중 마녀의 이야기 챕터가 있는데 리디북스에 올라온 개정판에는 이 부분이 없더라구... 뭔가 마녀에 대한 내용이 좀 더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게다가 보통 책빙의하는 주인공들은 삶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주로 현생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고아라든지 학대를 받았다든지..) 유영은 자신을 아껴주는 부모님도 멀쩡히 살아계시고.. 대학생활도 충실히 잘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냅다 다시 알렌에게 돌아갔어도 괜찮았던 것인가.. 퇴원하자마자 다시 고성 한 번만 보고 오겠다는 딸내미를 말리지 않고 한 번 다녀오라고 말한 어머니는 대체 어떤 심정이실지.. 유럽으로 연구생들 다 같이 데리고 탐사 왔는데 현장 무너져서 연구생들 다치고, 심지어 학부생 인턴은 2주 동안 코마 상태에 있다가 겨우 깨어나서 1층만 보고 오라고 허락해줬더니 도로 식물인간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들을 데리고 온 지도교수 괜찮은 것인가.. 물론 유영에게 있어서는 그 생활을 모두 버리고서도 다시 뛰어들만큼 커다란 사랑이었던 거겠지만.. 정말.. 괜찮은 것인가..........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밤 새서 읽은 소설이었다... <19세기 비망록>이나 <무덤의 정원>이나 둘 다 오래된 소설이다보니 요즘 로판(?)맛이 안 나는 게 또 별미다... 그렇다고 요즘 로판을 싫어하고 안 읽는 건 아니지만, 또 그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새로운 느낌이라서 좋다. 이 작가님 소설 다른 것들은 현대물이었던 거 같아서 아쉽다.. (현대물 거의 안 봄ㅠ) 다른 소설도 더 내주셨으면..ㅠㅠ
그리고 후기 쓰다가 알았는데 작가님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신 노래 중 하나. 소설의 제목과도 딱 맞아서 유튜브 링크를 남겨봄... 뭔가 성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지 못해 살아가는 알렌이 그려짐...
At the last quiet hour, she moves down through the vale,
and she waits there for the morrow in her garden of graves.
마지막 조용한 시각에 그녀는 계곡을 따라내려가,
그 무덤의 정원에서 내일을 기다리죠.
HOBBIES/웹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