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 여긴 캔자스가 아니야!>도 헌매사랑 같은 시기에 매일 챙겨 읽다가 흐지부지 결말 못 본 소설. 작년 초 쯤에 보다 말았던 것 같으니 아마 졸논 쓰느라 관뒀나보다(...) 하여간 <헌매사>랑 같이 <줄캔>도 이번에 단행본으로 첨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웹소설은 99.9% 로판만 보는 나지만 특이하게도 <줄캔>은 로판이 아니라 미국 하이틴 소설이다. 그니까 미국 하이틴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한 게 아니라 한국어로 쓴 미국 하이틴 소설... 분류상으로는 로설인데, 특이하게도 로설은 하나도 안 보고 로판만 보는 나 포함 내 주변인들 다 <줄캔>은 다 재밌게 봤다. 일반적으로 로설 독자층과 로판 독자층의 취향 사이에 거대한 강이 흐르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소설. 미국 하이틴이란 한국인 독자층에게 판타지와 같은 것인가...
소설 제목은 1939년 <오즈의 마법사> 영화에서 도로시가 한 대사에서 따온 듯 하다. "토토, 우리 더 이상 캔자스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Toto, I've a feeling we're not in Kansas anymore.)라는 대사가 관용구처럼 굳어져서 "더 이상 캔자스가 아니다"(not in Kansas anymore)라는 표현이 '익숙하고 편한 환경에서 벗어난'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줄캔>의 주인공은 본인의 이름 때문에 평생 셰익스피어무새들한테 시달려온(ㅋㅋㅋ) 빨간머리 소녀 '줄리엣 홀리데이'다. (모 소설의 줄리아 그린이랑 둘이 대화시켜보고 싶다...ㅋㅋㅋㅋㅋ) 그리고 이 소설의 남주는... 스토리의 극 후반부까지 가서야만 정해진다! 남주 후보는 총 셋. 학교의 킹카(이거 너무 옛날 말이니?)이자 쿼터백인 '그레이 홀트,' 줄리엣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 '루크 시어볼드', 그리고 어느 날 영국에서 전학 온 금발벽안의 왕자님 (같은 남학생) '로미오 뷰캐넌.' 이 셋 중 누가 남주인지 궁금한 사람은... 소설을 봐야한다!
이하 내용 스포!
그리고 이 셋 중 나의 픽은 로미오였다.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음...) 내 취향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함............... 신사적이지만 성격 꼬인 금발벽안의 미소년을 내가 어떻게 안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거임?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 있을리 없지... 나는 정말 완전 로미오 등장 극초반부터 감겼는데, 바로 이 대사 때문에.
"하지만 로미오라는 이름은 좋다고 생각해. 정말이야.
적당히 남성적이면서도 우아하고. 발음도 좋잖아.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의 상대역에게 브리트니나 아만다나 뭐 그런 이름을 붙였다면 지금보다도 로미오를 훨씬 더 좋아했을 텐데, 진짜로."
로미오가 소리 없이 미소 짓더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그 달콤한 향기에는 변함이 없음을."
이 순간에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을 읊는 건 너무 반칙 아니냐... '네 이름이 줄리엣이 아니었더라도 똑같이 네가 마음에 들었을 거야'라는 말을 셰익스피어 인용해서 전하는 이런 애를 어떻게 안 좋아하냐고... 이 장면에서 난 이미 로미오 파가 되었다.... (TMI: 이 대사는 원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오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하고 독백할 때 같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반대로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대사를 쳤지만. 로미오의 진상을 알게 되고나니 왜 <줄캔>에서는 이 말을 한 게 줄리엣이 아니라 로미오인지 알 것 같다. 줄리엣을 직접 만난 이후의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의 이름/출신/배경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줄리엣에게는 중요했으니...)
"난 네가 좋아. 내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를 남자로서 받아 달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로미오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냥 나는 너를 돕고 싶어.
너희 집을 돕고 싶고, 옳은 일을 하고 싶어."
(중략)
"이건 내가 가진 모든 걸 버리는 일이 아니야.
너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게. 그냥 내 선택이야.
형은 이 소송에 실패하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
"나를 이용해."
역시 로미오라면 사랑에 집안 하나는 팔아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실 사랑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지만.
비록 내 주식은 상장폐지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로미오가 좋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감정이 훨씬 절제된 것도 정중한 것도 좋았다.. 머리카락 넘겨주는 것도 집에 데려다주는 것도 전부 줄리엣의 허락을 받고나서야 하는 것도 좋았고,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여우 같이 자기를 봐달라고 어필하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난 애절하게 여주를 잡으려다가도 어쩔 수 없이 놓아주는 남캐가 좋아서... 오히려 주식 상장폐지 당하고나서 더 좋아졌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을 숨겼어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나왔어도, 로미오와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점이 너무 좋지 않나요!?!?) 로미오와 이어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초장부터 '그 애는 어느 날 이후 조용히 사라졌다. 소문에 의하면 여기서 몇 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로 끝날 것 같은 신비로운 소년 이미지긴 했지..ㅋㅋㅋㅋ 그래도 줄리엣이랑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가서 다행이야.
여담인데 다니엘 같은 애들이 혐관 쌓은 여자한테 어느 날 스며들어서 홀딱 반해버리는 스토리가 재밌는데. 근데 이런 애가 남주 아니라 조연이니까 정말 빡치더라... 나잇값 좀 해 다니엘 뷰캐넌...
이 소설에서 초반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만 많이 하고 <오즈의 마법사>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게 정말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로미오와 줄리엣>임과 동시에 <오즈의 마법사>인데 최소한 중반 정도까지는 <오즈의 마법사>를 거의 생각하지 않도록 짜인 소설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음... 그냥 배경이 캔자스라서 종종 튀어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틀로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없는 건 루크다. 왜냐면 루크의 모티프는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고, 로미오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로미오인데다가, 그레이도 '캔자스의 로미오'이기 때문에.
그런데 <오즈의 마법사>적으로 생각해보면 로미오는 겁쟁이 사자이고, 그레이는 허수아비다. (그레이는 로미오나 루크만큼 정확히 나온 적은 없지만... 그레이는 원래 공부를 안 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 것도 그렇고, 그레이 성격이 쾌활한 것도 그렇고 허수아비와 제일 비슷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오즈의 마법사>를 기반으로 한 <위키드>에서 허수아비에 해당하는 피예로와 좀 겹쳐보이기도 하고.) 둘 다 도로시와 여행을 함께하지만 결국 그 둘은 오즈의 세계의 인물들이고, 모험이 끝난 후 자기들의 세계에 남는다. 하지만 루크가 해당하는 강아지 토토는 처음부터 도로시와 함께였으며, 도로시의 여행이 끝난 후 함께 캔자스로 돌아온다.
로미오나 그레이와의 로맨스는 어느 정도 비일상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 제일은 로미오인데, 로미오가 나올 때 줄리엣은 항상 본인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하곤 한다. ('그저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내가 캔자스가 아니라 20세기 소설 속의 런던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레이도 어떻게 보면 '줄리엣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다. 줄리엣도 전국에서 주목받는 쿼터백 유망주인 그레이를 보면서 동경심을 느끼면서도 이질감을 느끼곤 한다. (줄리엣은 루크를 보면서도 동경심 및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줄리엣과 루크의 관계성은 그것보다는 '언제나 함께인 사람'이라는 감정 중심이니까) 나는 로미오와의 관계성에서 보이는 그 비일상적인 분위기가 좋았던 거지만... (특정 사람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같은 감각은 정말 마법 같지 않니...!?) 그치만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 마법 같은 감각에 온몸을 맡기는 사람이 오히려 살짝 광기에 젖었다고 볼 수도 있지...
사실 이렇게 '로미오'가 둘이나 다 탈락해버린 걸 생각해보면 <줄리엣, 여긴 캔자스가 아니야!>가 아니라 <줄리엣, 여긴 15세기 베로나가 아니야!>가 더 맞는 제목 아닌가 싶기도 하다ㅋㅋㅋㅋ 물론 전자가 진남주인 루크(토토!)와의 관계성이 더 두드러지니 이쪽이 정답이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남주인 루크의 마음이 두드러지는데, 정말... 쿠소 데카이 러브다... 루크 시어볼드 너 고2 맞냐?ㅠㅠㅠ 어쩌다가 고2짜리가 이런 무거운 사랑을 하게 된 거야... 근데 그런 녀석이 능력도 좋아서 웬 글로벌 대기업까지 해킹하고 범죄자도 엿맥인다. 오로지 줄리엣을 보호하고 줄리엣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줄리엣 아빠가 루크 보고 '웬만한 대학원생 1명보다도 더 도움이 된다'고 한 게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ㅠㅠㅋㅋㅋㅋ 후반부로 갈수록 나의 귀여운 너드미 소년은 어디 가고 치명적이고 섹시한 남자가 나타나가지고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하여간 뭔가 슈퍼맨 생각도 나고 그랬다ㅋㅋㅋㅋ 능력도 숨기고 있고 안경 벗으면 잘생겨지는 남자(?)
사실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주가 정해지는 소설은 누가 남주여도 아쉬움이 남는다..ㅠㅋ <줄캔>은 버릴 남주후보가 없이 다 너무 착하고 좋은 아이들만 있어서 더더욱... 루크와 이어진 지금은 '결국 사는 세계가 같은 사람과 이어지는 수 밖에 없나' 싶어서 아쉽고, 로미오와 이어졌으면 '줄리엣이라 로미오와 이어진다니 너무 진부하지 않아?' 싶었을 것이고 그레이와 이어졌으면 '쿼터백과 이어지는 하이틴은 500번 쯤 봤다' 싶었을 것이다ㅋㅋㅋㅋㅋㅋㅋ 그중에서는 그래도 루크와 이어진 지금의 스토리가 제일 신선한 편이지 않을까..? 원래 소꿉친구는 높은 확률로 서브남이니까..ㅋㅋㅋㅋㅋ
<줄캔> 읽으면서 온갖 추억의 노래들 다 들었다ㅋㅋㅋㅋ 뭐랄까 사실 '하이틴'이면 십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상하게 고등학생 때는 하이틴을 안 (못) 읽었고 초중딩 때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때 노래들이 많이 생각났다ㅋㅋㅋㅋ 테일러 스위프트의 초창기 곡들도 그렇고 <하이스쿨 뮤지컬>이나 <프린세스 다이어리>, <리지 맥과이어>, <한나 몬타나> 이런 것들..ㅋㅋㅋㅋㅋㅋ (딩초 시절 디즈니 채널의 노예였음..) 비교적 최근에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봤지만 하이틴이란 장르를 떠올릴 때 제일 생각나는 건 초중딩 때인 것 같아...
<줄캔> 읽으면서 제일 많이 흥얼거린 노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Love Story..ㅋㅋㅋㅋ 로미오와 줄리엣이니까! 원래도 엄청 좋아했던 노래였어서 오랜만에 계속 반복재생하는 중.
그리고 <줄캔>의 흰도요 작가님 블로그에 보면 작품 속 배경이나 인물들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재밌다. 비록 마지막 글이 작년 10월이지만..!! 돌아오세요 작가님..!!! 돌아와서 블로그글도 외전도 신작도 마저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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