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비망록> 완독

HOBBIES/웹소설

2023. 5. 7.

네이버 웹소설 시절 표지와 단행본 표지...

때는 2013년... 그전까진 웹툰이 뭔지도 몰랐던 갓반인이었던 내가 모 판타지 웹툰(특: 2023년 현재도 연재중)을 보기 시작하면서 웹소설까지 읽게 되는데... 그땐 한참 조선풍/동양풍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당시 나의 최애작: 광연.. 구그달.. etc) 서양풍은 별로 잘 안 봤던 것 같다. 

 

그 때 그 시절 네이벌 웹소 페이지..ㅋㅋㅋㅋㅋ

하지만 동양풍 러버였던 나도 그때 재밌게 봤던 소설이 <19세기 비망록>이었다. 10년 전 읽은 소설이다보니 워낙 가물가물한데 얼마전 인터넷 서치하다가 우연히 제목을 보고 다시 읽게 됐다. 리디에 개정판이 단행본으로도 나와있더라. 그리고 <19세기 말 비망록>이라는 살짝 다른 이름으로 다음/카카오 쪽에 완결된 웹툰도 있다. 예전 네이버 웹소설 시절 삽화 담당하시던 분이 웹툰화도 맡으셔서 웹툰도 보는데 추억 돋더란..ㅎㅎ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고딕풍 소설인데, 사실 그 외에도 생각나는 소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 같은 브론테 자매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9세기 비망록>도 재밌게 읽을 듯... 특히 나는 고딕풍의 스토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엄청 재밌게 읽었다! 쫄보라서 공포나 호러는 잘 못 보지만 고딕풍 정도면 나도 감당할 수 있는 짜릿함이라서 그런 걸까..ㅋㅋㅋㅋㅋ

 

아래는 줄거리 소개:

동화 '푸른 수염' 각색. 19세기 말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 양아버지의 죽음 후 릴리안은 자신을 친오라비라고 소개한 면식이 없는 남자를 따라 그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신사다운 그의 면모에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곧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 소리,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저택의 사람들을 통해 남자와 저택에게 기묘한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하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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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으면서 계속 찾은 짤들...ㅋㅋㅋㅠㅠ

사실 이 소설을 보게 된 이유는 표지의 금발남이다. (진짜 금발남에 미친놈 같네........) 트위터에서 다른 거 서치하다가 <19세기 비망록>이라는 제목을 보고 아 맞다 이 소설 재밌게 읽었었는데~ 하고 소설을 검색해봤더니 남주가 금발이더라고ㅎ.......ㅋ 근데 나 처연한 금발남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개빠그러진 망사랑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통 내가 보는 소설들은 개그/일상과 시리어스가 번갈아가면서 나오는데, <19세기 비망록>은 정말 사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만 한다. 나중엔 정말 얘네 좀 행복하게 해달라고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소위 말하는 '고구마'를 잘 견디는 편인데 이 소설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구마만 준다...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막판에 이르러서야만 사이다를 마실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다의 맛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고구마 함량 95%지만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근데 사실 로맨스도 로맨스지만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까운 소설인 것 같기도 하다. 독자는 릴리안의 눈으로만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릴리안이 이야기해주는 세상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거기서 언뜻 언뜻 보이는 균열을 통해서만 릴리안이 온전히 믿을만한 화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는 릴리안이 이야기하는대로, 독자는 윌리엄(인 척 하는 엘리엇)이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하는 근친자이자, 릴리안의 옆 방에 어떤 여자를 감금하고 고문하는 이중인격자이며, 저택의 사용인들은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었음에도 릴리안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가스라이팅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감금된 미친 여자라는 소재 때문에 너무나 <제인 에어> 같았다ㅋㅋㅋ 실제로 릴리안도 '내가 <제인 에어>를 너무 열심히 봤나!?' 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사실 릴리안은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릴리안이 해주는 이야기는 전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렇게 화자의 정신 상태를 온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 거짓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셔터 아일랜드>라든지 <메멘토> 같은 심리 스릴러 작품들이 생각났다. 정신병과 정신분석학을 이런 방식으로 다룬 로맨스 소설이라는 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분이 임상심리 쪽에서 일하시는 분이더란... 

 

여태까지 읽은 여러 가지 다른 작품이 생각나는 소설이기도 했다. 여성의 히스테리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제인 에어>를 오마쥬 했다는 점에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그리고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삼고 어머니가 주인공을 저택에서 구출해낸다는 점에선 <피로 물든 방>이 생각나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평범하게(?) 고딕 소설 같아서 <푸른 수염>보다 <제인 에어>에 더 가깝지 않나?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왜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잡았다고 하신지 알 것 같았다. <푸른 수염>에서 자물쇠가 걸린 방은 푸른 수염의 추악한 비밀을 숨겨둔 방이다. 반면 <19세기 비망록>에서의 잠긴 방에 갇혀있는 것은 릴리안이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묻어둔 기억이다. 사실 트라우마로 인해 일부 기억을 '상실'하고 그 기억을 상자에 넣어 봉인해둔다는 은유는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진 현대에 와서는 흔한 비유이지만, 그 은유를 푸른 수염의 방에 빗댄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소설에서 보이는 이런저런 상징들도 재밌었던 것 같다. '릴리안'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백합(lily)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엘리엇은 남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백합향 향수를 쓴다. 엘리엇이 릴리안을 연상케 하는 향수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로맨틱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여전히 과거에 묶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합, 그 중에서도 흰 백합은 순수와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지만 동시에 장례식에서 조화로 사용되는 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백합이라는 소재는 릴리안의 기억상실로 인한 무지, 그리고 무지로 인한 순수를 뜻하기도 하며, 릴리안과 엘리엇 모두 윌리엄이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온 삶을 다해 애도를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비라는 소재도 참 많이 등장한다. 그리스어로 프시케(psyche)는 마음, 혹은 영혼을 뜻하지만, 동시에 나비를 뜻하기도 한다. 윌리엄은 처음에는 릴리안이 좋아했던 나비를 기억해내기 위해 나비를 채집했고, 나중에는 나비를 좋아했던 엘리엇을 위해 나비 액자를 선물했다. 엘리엇은 윌리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비 액자를 부숴버렸고, 그 이후에는 액자를 버리지도 못 하고 부서진채로 나비를 전시해두었다. 소설 후반부에서 윌리엄은 릴리안을 '나의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릴리안이 스스로를 '영혼이 아픈 여자'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엘리엇 방에 걸린 망가진 푸른 나비가 떠오른다. 아마도 그 '망가진' 나비의 '박제'는 윌리엄, 릴리안, 엘리엇 모두의 망가져 과거에 사로잡힌 영혼을 뜻하는 듯하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태를 거쳐 나비가 되듯이, 나비는 재생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처럼 단행본 표지의 푸른 나비 두 마리는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릴리안과 엘리엇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은 이렇게 성장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로 끝났기 때문에 정말 아름다웠던 이야기로 생각되는 것 같다... 비록 윌리엄은 회복하지 못 했지만...........ㅠㅠ 

 

윌리엄................................

이 소설의 최애를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윌리엄이다. 목 놓아 부르짖다 죽을 그 이름 윌리엄 레온딘............ 윌리엄과 엘리엇의 과거 이야기에서 게임 <틱택토>와 <신학교>가 생각났다..ㅠㅠㅋㅋㅋ <틱택토>는 이유를 말하면 스포일 것 같고, <신학교>는 종교적 요소를 섞은 고딕 스토리+심리 스릴러라는 점이 워낙 비슷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BL겜이라서(ㅋㅠ) 둘 다 정말 갓겜이니 제발 플레이해주세요 정말 윌리엄은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어떻게 세상이 이 소년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나......... 얼마나 마음이 미어졌냐면 윌리엄 이야기가 나온 뒤로부터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서 메인 커플이 약간 아웃 오브 안중 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조금 후에 다시 릴리안을 마음 속 딸램으로 품었지만... 최애 장면도 릴리안과 윌리엄의 재회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저 정말 이 남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가슴이 너무 찢어짐...... 이렇게까지 (종이)남자 때문에 가슴 찢어지는 거 오랜만이야... 나 윌리엄 레온딘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빅토리안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드림캐를 만들어서 윌리엄이랑 만나게 해주는 상상까지 했어... 윌리엄이 제발 다른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 망상 속에서라도......... 제가 책임지고 이 남자를 박박 빨아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습니다............... 

 

그치만 남주인 엘리엇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금발남이라는 점에서 가산점이 붙었으며(...) 이 친구도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줘야 할 때가 오면 보내주는 녀석이더라구..^^ 로판 후기 포스트마다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난 때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 수 있는 남자야말로 상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하는 나의 상남자론

그래서 엘리엇이 쓰러져 울고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면서까지도 릴리안의 행복을 위해서 릴리안을 찾지 않았을 때, 저는 비로소 엘리엇에게 합격!!!을 외쳤습니다... 엘서방 자네도 릴리안이랑 같이 오래 오래 행복하도록 해........... 

 

아름다운 웹툰 단행본 표지...

 

그리고 윌리엄을 제발........... ㅎㅏ.............

작가의 말에서 이 부분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錄이 아닌, 悲忘錄. 등장인물들 중 누가 슬픔을 잊으려 기록하고, 누가 잊어버린 슬픔을 기록하는지를 다들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주면 좋겠다... 

 

아무리 10년 전이라지만 이런 애증범벅 망사랑 오브 망사랑 스토리를 읽고 기억나는게 음~ 재밌었다 정도라니 고등학교 때의 나는 인간의 마음이 없었나 싶다....... (그냥 그땐 내가 오타쿠가 아니었어서 or 끝까지 안 봤어서겠지만..) 사실 요즘 로판 감성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왠지 요즘에 나왔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나는 너무너무 좋았다............ㅠㅠ 이 작가님 다른 작품은 안 읽어봤는데 궁금해서 읽어보려구. 사실 회빙환 소재 없는 소설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무덤의 정원>을 언젠가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