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리디에서 연재중일 때 읽다가 다 못 끝냈었던 <헌터와 매드 사이언티스트>, 생각난 김에 리디에서 단행본으로 다시 다 사서 읽었다! 연재중일 때도 진짜 진짜 재밌게 봤었는데 연재중인 소설을 끝까지 다 보는 경우가 진짜 드문지라...ㅠ 그래도 한 반절 정도까진 연재중일 때 읽었는데. 연재중일 때 읽어야 작가님들한테 도움이 된대서 그러고 싶은데 끈기가 0에 수렴해서 항상 연재중인 작품은 흐지부지 그만 읽게 된다..ㅠㅠ
이하 스포주의!
<헌매사>의 배경은 빅토리안~에드워디안 어드메의 영국을 모티프로 삼은 가상의 스팀펑크 국가. 최근에 짬짬이 <더 크라운> 시즌 2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헌매사>도 그렇고 코드리아 같은 게임도 그렇고... 영국을 모티프로 한 가상국가들의 수장은 죄다 여왕인 게 웃기다ㅋㅋㅋ 여왕의 나라다 이거지... 암튼 (가상의) 빅토리안 잉글랜드라는 배경은 진짜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는데, <헌매사>에서는 작가님이 에스페란사의 노빠꾸력을 빌려 신랄하게 오스던의 제국주의를 깐다. 로판 보면서 은근히 '외부인'을 그리는 시선에 불편해지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런 간지러운 곳을 알맞게 긁어주는 느낌이었다ㅋㅋㅋㅋ 나도 리젠시라든지 빅토리안이라든지 그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돈을 위해 빅토리안 시대의 영국(오스던)을 식민지 삼았다는 설정에서 오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ㅋㅋㅋㅋ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에스페란사와 시더의 티키타카라고 생각한다. 둘이서 시덥잖은 농담으로 킬킬대는데 그 별 것 아닌 한 두 마디로 두 사람만의 유대감이 너무 잘 보임... 서로 한 마디도 안 지고 (말로) 치고받고 다투는 게 너무 즐겁다ㅋㅋㅋㅋ 이 소설 연재중일 때도 이 점에 제일 홀려서 단숨에 150화 쯤 읽었던 것 같다ㅋㅋㅋㅋ 그리고 19금은 커녕 15금도 안 달았는데 두 사람의 은근한 눈빛교환이... 은근한 스킨십이.. 그 어떤 19금보다도 섹시하다....
개인적으로 <헌매사>를 <읽씹왕자>랑 <무례다중>이랑 같이 내 3대 인생로판으로 꼽고 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더 클라이번.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내 취향인 남주였다. 나의 로판남주 취향의 이데아........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아래의 이미지와 같음. (<무례다중> 후기에서도 이 짤을 썼었는데...)
겉보기로는 그림으로 그린듯한 완벽한 신사(+금발)이라는 비주얼에, 그렇지 못한 속내를 가진 남정네들이 좋다...ㅋㅋㅋㅋㅋ 오만하지만 사실 속에 상처를 품고 있는 섬세한 영혼들... 에스페란사 말마따나, 섬세해서 좋다.
그리고 내 남캐픽을 보고 지인분이 해주신 말씀인데ㅋㅋㅋㅋ 너무 구구절절 공감이 가서 허락받고 블로그에도 올린다ㅋㅋㅋ 뭐랄까 주류사회의 정수 같은 비주얼과 배경을 타고나서 그 배경을 이용은 하지만 묘하게 그 가치로부터는 거리를 두는, 배배꼬인 염세적인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허울 좋은 소리만 하는 기만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강남 좌파(?) 같은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듯(???)
물론 시더 클라이번은 저기 위의 세 남정네들보다는 훨씬 덜 빠그러진 삶을 살았고 정신도 건강하니 완전히 유안-엔리케-라이너스 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더도 대충 그 비슷한 범주에 든다. 백작이라는 지위를 적당히 이용해먹지만, 거기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대충 편리한 버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대충 그 비슷한 계열임.
시더가 좋았던 두 번째 이유는 사실 첫 번째랑 좀 상충되긴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시더가 '평판'을 신경쓰는 남주인 게 좋았다ㅎㅎ 에스페란사 발목만 봐도 기겁하는 것도 그렇고(ㅋㅋㅋㅋ) 적당히 뺀질대긴 하지만, 또 의회에 출석한다든지 기부금을 내는 등 적당히 주류사회의 요구에 맞춰주는 모습이 새로워 보였던 듯. 해상전투 직전에 다른 로판에 나오는 북부대공st의 캐릭터 같았으면 (군함에 갇힐 일도 없었겠지만) 군함에 갇혔다 한들 자신의 지위로 무대뽀로 배를 돌린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았을텐데, 시더는 어쨌든 평생을 상류사회의 신사 계급으로 살아온 사람이라서 그러지 못 했다는 게 좋았다ㅋㅋㅋㅋ 캐릭터의 사고의 한계가 정해져있어서 그런가 훨씬 생생한 느낌. 에스페란사와 사랑에 빠져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든간에, 시더 클라이번은 카펫에 눕기 싫어하고 소파에 눕는 건 상상도 못하는, 뼛속까지 오스던 제국 백작가의 금지옥엽 외동 아들로 태어난 귀족인 거지..ㅋㅋ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너무 좋았다. 사랑하기에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을 아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맛보고 나면 집착 같은 건 사랑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의 의사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할 것 아니냐....!!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 감정만 몰아붙이는 것이 어디가 사랑이더냐.....!!!! 그건 그냥 자기 감정에 취한 것 뿐이지... (집착남만 보면 가스통 할배 됨) 아무튼 시더는 다른 남자가 에스페란사에게 구애를 하려고 할 때도 특별하게 막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구혼자의 구애도 허락하실 생각이신지요?"
"물론 에스페란사가 원한다면."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선택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주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를 고르기를 바랐다.
에스페란사가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본인을 선택하길 원했으니까. 그렇지 않은 선택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시더가 항상 에스페란사의 의지를 가장 우선으로 두는 것이 너무 너무 좋았다. (그리고 거기서 엿보이는 자신감과 오만함도ㅎㅎ) 그리고 이게 비단 구애뿐만 아니라, 에스페란사의 마지막 선택까지도 이어진다는 것도 완벽했음.
"마지막이에요."
"......네."
"마지막이니까, 딱 한번만 말할게요."
눈시울이 붉었다. 눈동자도 조금 젖어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저 숨을 나직이 내쉬었을 뿐이다.
"가지 말아요."
마지막에서야 이런 말을 꺼낸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선택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에 에스페란사가 남아주길 바라면서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눈물 흘리며 단 한 번 애원한다... 남아달라고... 그리고 그걸 거절한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의지를 존중할 것을 알기에... 거절당할 미래를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은 동앗줄이라도 쥐어보고 싶어 단 한 번 입 밖으로 소망을 꺼내보는 그 간절함에 그 가슴이 미어지게 되는 것이다... 집착남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진정한 산해진미............. 때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 수 있는 남자야말로 상남자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상남자는 다음 트윗과 같다.)
소설이 막바지에 가까워질수록 진짜 숨도 못 쉬고 읽었다. 도저히 소설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서... 웬만해서는 사이러스랑 다리아를 물리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만, 에스페란사가 남을까, 아니면 우선은 헤어진 후에 시더가 저쪽으로 넘어갈까? 에스페란사가 남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남게 될지? 너무 궁금해서 다음날 출근해야하는데도 핸드폰을 못 놓고 읽었다. 개인적으로 에스페란사가 시더와 함께 남기로 결정했을 때의 대사가 참 좋았다.
사랑만으로 살아갈 세계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순간만큼은 사랑이 모든 것이었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어?
저 남자가, 이 감정이, 이 세계가 내 뿌리를 전부 버릴 가치가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물었다.
그 대답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단점이 없는 무결한 선택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감내하고서도 시더 곁에 남겠다고 결정한 에스페란사의 선택이 너무나 좋았다... 무결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진솔하고 절실한 감정이 되었음... 사랑이란 감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게 아닐까....ㅜㅜ
여기서부터는 그냥 두서 없이 좋았던 장면들의 나열.
그러나 시더는 그 상태로 가만히 여운을 곱씹었다.
포옹은 달았다. 인사는 부드러웠고.
자비 없는 살육자의 눈빛이 녹아내리던 때의 쾌감처럼.
......친구라고?
"아, 웃기지 말아요. 에스페란사."
쿵. 문이 닫혔다.
예배실 안은 좁고, 사람은 북적거리고, 피와 고름과 신음과 울음으로 가득했다.
절망뿐인 공간.
"늦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의 작은 희망.
그는 부르는 게 값일 기계들이 잡동사니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어린 소년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래요?"
"당신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어쩌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에 절인 나머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미한 정신에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 돌아가게 멋진 내 사랑.
"좋았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스페란사는 곧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후회 없을 만큼."
그 외에도 에스페란사가 시더보다 연상인 점도 좋고... 에스페란사와 시더가 둘다 상대방의 눈빛이 자신을 바라볼 때만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을 자각한 것도 좋고... 시더가 감정을 깨닫고 나서 노빠꾸 플러팅맨이 된 것도 너무 좋았고... (시더의 낯간지러운 유혹을 너무 사랑함) 시더가 아버지의 망한 사랑을 보고 배워서 반면교사로 본인의 사랑은 엄청나게 티를 내는 게 좋고...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자꾸 다치는 척 하는 것도 좋고... 에스페란사 이름 뜻이 '희망'인 것도 좋고... 하여간 좋은 점을 나열하면 끝도 없다.
물론 <헌매사>에도 단점은 있다... 좀 떡밥이 덜 풀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넘어간 구석도 있음. 개인적으로 제일 의문인 점은 '몸'에 대한 문제다... '황금 발톱'에 접속할 때 분명 플레이어들의 몸은 기계에 연결되어 있고 영혼 혹은 의식만 이세계로 넘어가는 거라고 했는데? 에스페란사는 분명 '커마'를 했다고 했는데, 시더네 세계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이세계라면 플레이어들이 '커마'한 몸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된 거지? '플레이어'들이 접속을 안 하고 있을 때 그 몸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현실세계'에서의 에스페란사의 몸은 아직도 기계에 연결되어서 식물인간처럼 연명만 하고 있는 건가? 외전에서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21세기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왜 에스페란사는 원래의 몸으로 깨어나지 않고 보라색 눈을 한 그 몸으로 이동한 거지? 그럼 황금 발톱으로 강제로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내진 다리아와 사이러스는 평생 외국인 비주얼로 한국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건가!?!
게다가 사실 겜판으로 시작했지만, 세계에 대한 진상이 풀리지 않은 소설 초반부에도 별로 겜판 같지는 않다... 에스페란사의 닉이 '친절한 탕수육'이 아니라 '에스페란사'라는 데서부터... (혹시 게임에 빙의할 위험을 위해 겜닉은 언제나 lore-friendly하게 짓자!) 게다가 이 세상이 사실은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이러스와 다리아가 둘만 있을 때 야 김뫄뫄! 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서로 겜닉으로 부르는 게 너무 이상했다... (내 남동생이 나를 겜닉으로 부르면 나는 동생을 PK 해버렸을 거임...) 나중에는 다리아랑 사이러스가 한국인이 아닌가? 싶었는데 에스페란사는 '황금 발톱'을 게임으로 즐기던 시절 사이러스와 평범하게 한국어로 소통한 것 같고.
그리고 외전이 좀 계륵 같았다... 외전도 너무 즐겁게 읽기는 했는데 뭐랄까 독자의 망상으로 남겨둬야 하는 영역을 공식에서 풀어버린 느낌... 외전 2의 시더의 기억상실증 에피소드는 진짜 뜬금 없었고, 3의 이세계 이동 에피소드는 설정 구멍이 좀 더 적나라해진 느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즐겁게 읽었지만...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레이디 에이번데일,' '백작 부인'이라고 부를 때 사망했음) 본편이나 외전 1 정도로만 끝났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단점을 쓸데없이 길게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너무나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아까 위에서 말했듯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니까...^^
진짜 두서 없는 후기가 되었는데 나는 원래 너무 좋을수록 좋았던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중언부언할수록 그만큼 재밌었구나 하고 생각해줘...
아무튼 <헌매사>는 판타지와 로맨스를 황금 비율로 섞은 갓작이다.. 에스페란사의 액션씬과 시더 & 에스페란사의 로맨스 씬이 정말 적절하게 분배되어 있다. 외전 제외 총 7권이라서 분량이 좀 길긴 한데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음. 그리고 배경도 영국 상류계층이고, 시더 대사 같은 걸 보면 (배경 시대는 다르지만서도) 오스틴이나 브론테 소설 좋아했던 사람들이면 아마 이 소설 좋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ㅋㅋㅋㅋㅋ 진짜 <읽씹왕자>, <무례다중>과 함께 내 인생 3대 로판으로 꼽는 소설이고 누가 물어봐도 강추해줄 수 있음...
오늘도 언젠가 작가님이 <헌매사> 소장본을 내주시길 바라며 잠에 들어야지...^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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